남산 숲길을 타워에서 내려오는 대신 올라가는 순서로 걸어본 후기

마음이 계절을 따라잡지 못한 날이었음. 바람 한 줄기에 계절이 넘어가는 게 느껴지는데 머리는 아직 지난달에 있었던 것. 그래서 남산으로 감.

최근 새로 열린 남산하늘숲길은 계단 없는 데크길이라 걷기 자체는 쉬움. 그날 내가 고른 건 어디를 걷느냐보다 어느 방향으로 걷느냐였음. 많은 사람이 타워에서 내려오는 쪽으로 걷는데 반대로 올라가기로 한 것. 출장 아침에 공원에서 한 시간을 썼던 날과 달리 이번엔 순서를 미리 정하고 들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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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요약 · 마음이 계절을 따라잡지 못한 날 남산하늘숲길로 갔음. 많은 사람이 타워에서 내려오는 방향으로 걷는데 반대로 소월정원에서 올라가는 코스를 골랐고, 전망대 몇 곳과 곤충호텔을 들르며 40분에서 55분이 걸림. 끝에 큰 장면을 두면 기억이 좋아진다는 정점·끝 규칙으로 고른 순서였는데, 복잡한 경험에서는 정점과 끝보다 전체 평균이 기억을 더 잘 예측했다는 가상현실 실험을 읽고 두 방향의 차이가 끝보다 중간에 있다는 걸 표로 정리함.

올라가는 코스를 고른 이유

나무 사이로 완만하게 올라가는 나무 데크 산책로
올라가는 방향의 데크. 계단이 없어서 숨은 안 차는데 장면은 계속 바뀌었음.

시작점은 남산도서관 앞 소월정원. 회현역 5번 출구에서 걷거나 402번이나 405번 버스로 남산도서관에서 내리면 바로 데크로 들어갈 수 있음. 전체 1.63km에 무장애 데크가 1.45km라 유모차나 휠체어도 되고 반려견은 목줄만 하면 됨. 입장료는 없음.

코스는 소월정원에서 느티나무 전망대, 참나무 전망대, 솔빛 전망대, 하늘전망다리, 벚나무 전망대, 노을 전망대, 건강정원을 지나 남산서울타워에서 끝남. 올라갈수록 풍경이 단단해지고 마지막에 타워가 절정처럼 나오는 순서였음.

내려오는 방향이면 타워를 먼저 보고 숲으로 내려감. 제일 큰 장면이 앞에 오고 뒤로 갈수록 조용해지는 순서. 같은 길인데 끝이 다르다는 게 이 선택의 전부였던 것.

40분에서 55분 사이에 본 것

나뭇가지 사이로 올려다본 남산서울타워와 파란 하늘
코스의 끝에서 올려다본 타워. 이 장면을 마지막에 두려고 방향을 정했음.

걷기 시작하고 10분쯤 지나면 솔빛전망대가 보임. 남산 소나무 향이 나는 자리였음. 데크 바닥에는 떨어진 잎이 쌓여 있었고 발이 닿을 때마다 잔잔한 소리가 났던 것.

하늘전망다리는 나무 사이로 난 긴 구조물이라 데크 아래 숲길과 위로 열린 하늘이 겹쳐 보였음. 바람이 잘 통해서 걷는 속도가 저절로 늦어짐. 느티나무 전망대에서는 명동 일대가 내려다보였고, 참나무 전망대는 나무 색이 제일 진한 자리였음.

중간에 곤충호텔이라는 작은 집 모양 구조물이 있었음. 남산에서 쓰러진 나무를 재활용해 곤충이 겨울을 나는 자리로 만든 것. 이 길이 산책로로만 설계된 게 아니라 남산 생태를 지키는 쪽까지 본 설계라는 표시로 보였음.

전망대 몇 곳에서 사진을 찍고 곤충호텔도 둘러보며 올라갔더니 40분에서 55분 사이가 걸림. 천천히 쉬어가도 한 시간을 넘기기 어려운 길이었음. 주차는 남산도서관 주차장이 진입이 제일 쉽고 예장자락 공영주차장에서 소월정원까지 걸어서 5분인데, 주말엔 대부분 금방 만차라 대중교통이 안정적임.

걷는 순서 인포카드
같은 길을 반대 방향으로 걸었을 때 기억에 남는 게 달라지는 구조.

순서가 기억을 만든다는 말은 어디까지 맞았을까

대니얼 카너먼은 『생각에 관한 생각』(김영사)에서 경험하는 자아와 기억하는 자아를 나눔. 기억하는 자아는 경험 전체를 더하지 않고 가장 강한 순간과 마지막 순간으로 경험을 평가한다는 것. 대장내시경 실험에서 검사 끝을 덜 아픈 구간으로 조금 더 끌었더니 총 고통은 늘었는데 기억은 나아졌다는 대목이 나옴.

내가 오름길을 고른 건 이 대목 때문이었음. 끝에 타워가 오면 기억이 좋게 남을 거라는 계산.

근데 스트라이보슈와 동료들이 2019년 Frontiers in Psychology에 낸 가상현실 실험은 이 규칙이 단순한 경험에서만 잘 맞는다고 씀. 통증처럼 한 가지 차원의 경험이 아니라 여러 감정이 섞인 복잡한 경험에서는 정점과 끝보다 경험 전체의 평균 감정이 기억을 더 잘 예측했다는 것. 일상의 경험은 대부분 복잡한 쪽이라 규칙을 그대로 옮기기 어렵다고 정리함.

이걸 읽고 내 산책을 다시 봄. 타워가 끝에 온 게 기억을 만들었는지, 40분 내내 괜찮았던 게 기억을 만들었는지 나는 구분할 수 없었음. 내려오는 방향으로는 안 걸어봤으니까. 확실한 건 하나임. 오름길은 10분째 소나무 향부터 끝까지 계속 괜찮았다는 것.

걷는 방향 첫 장면 끝 장면 중간
타워에서 내려오기 타워와 도심 전망 도서관 앞 정원 점점 조용해짐
소월정원에서 올라가기 잎 쌓인 데크 타워 전망대마다 풍경이 커짐

표를 그리니 두 방향의 차이는 끝보다 중간에 있었음. 올라가는 쪽은 중간이 계속 커지는 순서고 내려오는 쪽은 중간이 계속 줄어드는 순서. 평균으로 기억이 정해진다면 이 중간이 갈랐을 것.

일상에 옮긴 건 이미 하던 것 하나였음. 일을 끊을 때 다음 첫 줄을 적어두는 규칙은 하루의 끝을 정리하는 쪽이었는데, 이번에 본 건 끝만 손보면 부족하다는 것. 걸으면 생각이 정리되는 이유에 썼던 산책을 점심 뒤에 두는 것도 중간을 손보는 쪽에 가까웠다고 봄.

자주 묻는 질문

Q. 내려오는 방향이 더 편하지 않음?
편함은 비슷함. 계단이 없는 데크라 오름길도 숨이 차지 않았고 40분에서 55분이면 끝남. 차이는 몸보다 장면 순서였고, 한 번은 올라가는 쪽으로 걸어볼 만했음.

Q. 순서를 바꾸면 기억이 정말 달라짐?
내 산책 한 번으로는 모름. 카너먼 쪽 실험은 순서가 기억을 바꾼다고 했고 2019년 가상현실 실험은 복잡한 경험에서는 평균이 더 중요하다고 했음. 둘 다 맞다면 끝을 좋게 두는 것과 중간을 나쁘지 않게 두는 걸 같이 하면 됨.

오늘 해볼 것

이번 주 산책 하나를 반대 방향으로 걸어보면 됨. 늘 끝나던 자리에서 시작해서 늘 시작하던 자리에서 끝내는 것. 걸은 뒤에 뭐가 남았는지 한 줄만 적어두면 다음에 비교할 수 있음. 아침 햇빛과 걷기를 같이 두는 얘기는 아침 햇빛 15분 글에, 전화를 걸으면서 받은 열흘은 통화가 짧아진 이유에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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